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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분주한 사람들 (Busy People)

Translated by: Hyung Ho Kim____ Written by: 글: 이안 리드. 카렌 라오 (Karen & Ian)


나는 여러 곳에 살아 왔습니다. 또 많은 곳을 다녀 보기도 했습니다. 잇따라 수 십년을 견디며, 또 여러 시대를 살아 왔습니다. 나는 그 동안 많은 변화와 세태 그리고 여러 유행을 목격했는데, 그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소위 ‘분주한 사람들’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주한 사람들은 목적도 초점도 없고 충분한 시간 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어딘가 가기 위하여 무엇인가 하기 위하여 또 누군가 되기 위하여 늘 바쁩니다. 그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만일 그들이 대답할 시간이 있다면 이렇게 대답 할 것입니다. 그들은 혹사 와 저임금, 거기다가 피곤하고 불안하다고. 만일 그들이 솔직하다면 공허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분주한 사람들은 항상 배우고, 쇼핑하고, 경쟁하며, 만나고 움직이며, 그러고도 권태로워 합니다. 그들은 너무 바빠 ‘안녕하세요’ 인사 조차 하지 못하고 너무 바쁜 통에 어떻게 지나세요 라고 물어 보지도 못합니다. 너무 바쁜 바람에 당신이 누구시더라 물어 보지 못합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되게 했습니까?

오늘 날의 사회는 당신이 얼마 만큼 성취하였느냐, 그 성취를 위하여 얼마만큼 바쁘게 지냈느냐에 따라 성공을 평가합니다. 예를 들자면,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제일 좋은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면 그들로서는 크게 성공했다고 간주 됩니다. 그러나 대학이란 자리와 시설면에 있어서 제한이 있고 게다가 지원자는 늘고 해서 아이는 공부를 잘해야 됩니다. 이래서 이 과목에 과외를 시키고 저 과목에 특수 반에 넣게 되어 바빠집니다. 토요일에는 수학 과외, 수요일 저녁에는 논술 반에, 월요일 저녁에는 과학 반에… 이렇게 시간표가 이어집니다. 열 살이 되면 아이는 내가 평생을 살아 온 것 보다 더 바빠집니다. 바쁜 생활은 경쟁으로 시작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많은 부모들은 다른 부모들과 사회적으로 경쟁 하게 됩니다. 과외가 수학, 과학 그리고 영어에만 끝나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무용, 연극, 미술 같은 특수 과외도 추가 시킵니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세련되고 교양을 갖춘 자신들의 작은 분신으로 보이기를 원합니다.

연극 과외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태생적으로 연기자들이니까요. 성탄절 때 아이들이 얼마나 잘 하는지 보십시오. 무용 교습도 똑 같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지역 학교에서 무용에 관한 것이라면 그 애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제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애가 40 살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당신의 아이에게 북유럽 춤이나, 켈트 춤이나 아니면 사자 춤을 억지로 배우게 한다고 해서 그 애가 고마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용이 엄청나게 더 들면서 헛된 척도가 되는 것은 음악 교습입니다. 매주 한 시간의 교습에 네 시간의 연습을 더하게 되면 돈은 고사하고 많은 시간이 소요 됩니다. 왜 그럽니까. 그렇게 해서 부모는 친구들이 놀러 오면 아이의 재주를 과시해 보려는 것인가요? 내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당신의 아이는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배우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욱이 쇼팽의 5번 둔주곡 G 단조를 연주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만일 그 아이가 음악을 좋아 한다면 광고를 보시고 100 불 짜리 중고 기타 하나 사서 아이에게 주세요. 그리고 하고 싶을 때 치면서 즐기라고 하세요.

어떤 부모님들은 그들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마련된 활동을 자녀들에게 택하도록 강요합니다. 이는 사실 부모들 자신들도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 것들인데, 민속 무용이거나 붓글씨 아니면 이런 저런 여러 가지 교습들일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긴 시간이 소요되고 성취는 거이 없습니다. 역사광인 나는 나의 조상들과 그들의 풍습, 무용, 음악등에 관하여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나에게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민족 의식을 강제로 주입시키는 것은 대게 시간 낭비일 뿐이고 흔히 가장된 편견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술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단조로움을 제거해주고 긴장을 풀도록 자유롭게 해 줍니다. 세탁기는 한 때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었던 일을 순식간에 해 치웁니다. 하지만 이제는 컴퓨터와 테레비죤에 여유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루에 두 시간 동안 테레비죤을 보고 인터넷을 한시간 한다면 일년 동안 천 시간을 잃게 됩니다. 만일 15 살에서 75 살 까지 테레비죤을 본다면 6만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데 햇수로 8년이 넘습니다.

분주한 사람들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그들은 일하면서 먹고, 차를 몰면서 먹고, 먹으면서 휴대전화로 대화를 하고, 먹으면서 걷습니다. 어떤 사람은 T.V. 보면서 휴대전화로 이야기하고 동시에 인터넷을 합니다. 사람은 한번에 한가지 일 이상을 할 수도 없고 양쪽에서 모두 이득을 볼 수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요. 만약 운전하면서 이야기한다면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너무 천천히 가든지, 차선을 벗어나게 되거나 신호등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제발 차를 길 옆에 세우고 하고싶은 이야기 다 하세요. 만약 당신이 일하면서 먹는다면 당신은 그 음식을 즐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소화 기관에도 좋을 리가 없지요.

분주한 사람들은 흔히 외로운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작은 방에 격리되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안락 의자에 대짜로 누어 유리 조각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테레비죤은 그들이 갖고 있지 않는 생활과 친구들을 대신할 가상적인 생활과 친구들을 창조해 냅니다. 그 개인을 고립시킴으로 테레비죤은 그 사람의 생활을 훔쳐 갑니다.

분주한 사람들은 바쁜 거름으로 생활하는데, 곧 속도를 주리기가 불가능 해집니다. 맹렬한 생활 속도는 독서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역사, 지리, 문화 그 밖에 책으로 기록된 많은 것들을 분주한 사람들은 읽을 시간이 없기 때문에 배울 수가 없습니다. 바뿐 일정에서 오는 공백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빼앗기게 됩니다. 한편 그들이 이따금 책을 읽는다고 해도 그 내용이 너무 천천히 전개 되기 때문에 그들은 책의 줄거리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아니면 그 정보를 소화시킬 충분한 사간을 갖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과 그 내용을 토론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선 그들 대부분은 주차에 소요될 시간, 책을 찾고, 줄을 서고, 빌린 책을 가지고 도서관을 나설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또한 잠간 걸어가는 것조차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싫어합니다. 물론 주말 야영(camping)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음식은 허겁지겁 먹고 즐기지 않습니다. 행사들이 너무 급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바쁜 사람들은 급하게 먹는 음식 때문에 가슴앓이를 합니다. 더더욱 나쁜 것은 바쁜 사람들은 대개 패스트프드를 먹습니다. 그 결과로 심장병, 고혈압, 뇌일혈, 당뇨병, 신경장애 등 병을 얻게 됩니다. 이런 병을 앓고 있는 양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분주한 사람들은 좁은 태두리 안에서 생활 합니다. 그들은 “여기”와 “현제”에 살고 있습니다. 매 순간이 그들을 만족시켜야 하고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분주함이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물의 깊이를 생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들에게는 역사란 그저 역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지난 날을 생각하고 미래를 따져볼 시간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비록 가장 짧게 나눈 대화일지라도 그들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게 되기 때문에 분주한 사람들은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들은 나를 가로 막고 내 말을 끝내지 못하게 하는데, 심지어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도 전화를 걸려고 합니다. 그들은 내가 거기 없는 것 같이 딴 생각에 여념이 없습니다.

바쁜 사람들은 미친 듯 활동 함으로 나이 먹는 것, 질병, 고독,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것 같이 공허감을 피하려고 애씁니다.

나는 분주한 사람들에게 진저리가 납니다. 그 사람들은 매듭 강습소 다니는 이야기 아니면 보리비아 바구니 제조 탐방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라든지 재즈음악 반주를 동반한 에어로빅 운동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대화는 언제나 그들의 신상에 관한 것이거나, 경력이나 취미 그리고 자신들의 생활에 관한 것들입니다.

나는 바쁜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대합니다.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전화를 끊으라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만일 그들이 거부하고 전화를 걸 때는 나는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만일 그들이 자꾸 시계를 보면 내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는 자리를 뜹니다. 만일 그들이 놀라기라도 한면 나는 그들에게 말하지요.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하나의 특전이라고, 그래서 나는 아무하고나 어떤 일에도 시간을 나누고 쉽지 않다고.

그러면 성경의 견해를 봅시다. 창세기 2장 2절에 하나님께서는 지으시던 일을 다 이루시고 안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끝나면 저녁이나 주말에 정열적인 활동을 하기 위하여 달려 나갑니다. 방금 언급한 성경 말씀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휴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의 안식을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족과 고용인들에게도 주셨습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지으신 낙원에서의 삶에 만족했습니다. 그들이 광적인 삶을 살았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모세는 시네 산 정상에 40일 동안, 그것도 두 번이나 올라 갔습니다. 그는 하루, 하루 일어 나는 무의미한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조용이 그리고 참을성 있게 앉아서 하나님을 청종하는 능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토지를 쉬게 해서 지력을 회복 시키기 위하여 일년의 휴경을 명하셨습니다. 토지를 쉴 틈 없이 경작하다 보면 오래 가지 못해서 지력이 쇠하고 맙니다.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는 진리입니다.

욥기 3장 13절에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나 지금 누워서 안식을 누릴 터인데, 잠 들어 쉬고 있을 터인데.” 라고 말씀합니다. 욥은 엄청난 고난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이 계속 더해지자 그의 생각은 안식에 대한 생각에 집중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는 분망한 활동을 함으로 고통을 잊으려 하기 보다 휴식을 취하여야 합니다.

성경 시편 첫 머리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시간을 보내면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가슴 속에 평온과 화평이 있게 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할 길잡이이기도 합니다. 단정하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활동 보다도 더 중요한 것입니다.

수 천년 전에 기록된 시편 22장 2절에서 기자는 하나님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데 오늘 날의 세상에 대하여도 완벽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 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하십니까.”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안식을 받기를 간구하나 얻지 못하여 그의 날이 혼돈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 사람은 광야 사막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여 이 시편을 썼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 험악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 기자보다 천 배나 더 딴데다가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바빠 하나님을 떠나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를 청종하시겠습니까?

시편 116편 7절은 “여호와께서 너를 너그럽게 대하셨으니 내 영혼아, 너 이제 평안히 쉬어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이 평온을 얻게 됩니다. 평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전도서 2장 23절은 계속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솔로몬 왕은 “날마다 낮에는 뼈 아프게 일하고 밤에는 마음을 죄어 걱정해 보지만 이 또한 헛된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솔로몬 왕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이 결코 우리를 만족 시켜주지 못하고, 따라서 우리에게 평온도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평온은 건전한 사람이 추구할 목표입니다.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분주하게 살기 위하여 극단적으로 치닫고 평온을 기피합니다.

전쟁은 우주적인 악입니다. 평온에 대하여 전쟁 보다 더 큰 원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쟁 끝에 오는 평온은 은혜라고 분명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11장 23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시고 백성들은 평온을 얻습니다. 사사기 3장 11절은 “사십년 동안 세상은 평온하였다” 라고 말씀합니다. 사사기 3장 30절은 “그 땅이 팔십년 동안 평온하였다” 라고 말씀합니다. 전쟁으로부터 평온이 필요한 것은 글자 그대로일 수도 비유적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싸우고 있는 전쟁이, 병이나 마약이나 다른 어떤 것이든, 그 것이 바쁜 일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휴식을 취해서 다시 활력을 찾고 회복하고 재 충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다운 평온은 조용히 앉아 있거나 산보하거나, 기도하거나 기독교인으로서 마음을 가라 안치고 자성의 시간을 가짐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평온은 모임에 참석하거나, 흥청망청 쇼핑하거나, TV를 보면서 휴대 전화로 대화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평온을 얻는 도피처를 컴퓨터에서 찾습니다.

역대 하 32장 22절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어떻게 사악한 왕의 손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대 하 기자는 하나님께서 “사방으로 태평성대를 누리게 해주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들이 싸이고 두려움이 몰려 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달려 가야 합니다. 그래야 평온을 찾습니다. 평온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주십니다.

이사야 14장 1절에서 7절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에서 평강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받습니다.(이사야 14:3) 그리하여 온 땅이 평온하고 온정 하게 되어 온 백성이 노래하리라고(이사야 14:7)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 뜻은 분명합니다. 안식입니다. 고통이나 괴로움을 격은 후, 혹은 심지어 매일 매일의 일과를 끝낸 후에라도 우리에게 휴식은 필요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6장 16절에서 성경은 지혜를 구하고 그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 심령에 평강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혜는 춤 방, 소란스러운 파티, 심지어 지식인들의 토론 장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 것은 또한 술집이나 운동 교실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히 여길 때 찾아지게 되는데 그 하나는 평강입니다.

히브리서 3장 10절 11절에서 하나님은 노여움을 품고 말씀하십니다. “저희는(불순종의 백성들) 내 안식에 들어 오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노를 품으시는데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 되었기”(히브리서 3:10)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쉬 마음이 빼앗기거나 취미생활이나 여러 가지 모임 때문에 탈선하게 됩니다. 목적 없이 바쁘면 바빠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히브리서 4장 1절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 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 말씀 중에 천국은 “안식”의 장소로 묘사 되고 있습니다. 그 곳은 최상의 행복이 약속된 안식의 장소입니다. 안식이야 말로 우리의 목표요 – 그 곳에는 더 이상 활동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분주한 생활은 잠시 동안에도 많은 활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좋은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일 주일에 한 번씩 운동이나 음악 교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알고 지낼 뿐입니다.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당신은 그들 가운데 그들의 이름(성)을 기억하는 사람을 몇 명이나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이런 저런 교습 반을 택하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등록하는 이유는 그들의 자부심을 키우고 성취 감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이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누구든 그의 삶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사회 활동을 했느냐에 관심이 없고 다만 안식을 얻지 못하고 일생을 보낸 슬픔을 곰곰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바쁘게 지내므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자부심이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붓 들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에 있는 것이지 우리가 무었을 하고 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들판 한 가운데 혼자 앉아 있을 수 있고 그곳에서 안전 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걸 느끼기 위해 분주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쁘게 지낸다라고 말하는 것은 각 개인에게는 모욕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정체성은 이 세상에 연결 되어있다는 생각에 매어 있고, 무엇인가 쫓으며 미치광이 같은 경쟁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딴 사람들 모두가 새로운 주장이나 시류를 쫓는다면 그도 또한 성공하기 위하여 그 어리석은 짓거리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는 자기의 개성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분주함은 세상 사람들에게만 제한 되어있지 않습니다. 분주함은 기독교계에도 역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설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타당한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십년을 함께 했던 남편과 금방 사별하여 깊은 상심에 빠진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였기에 이제 혼자가 된 기분입니다. 친구가 그녀에게 이웃교회에 가 보라고 권합니다. 월요일 아침에 교회에 전화를 합니다만 응답기에 연결 될 뿐입니다. 월요일 오후에 다른 몇 교회에 전화를 했습니다만 응답이 없거나, 응답기만 나오거나, 사무원이 그녀의 용건만 받아 놓을 뿐입니다. 화요일에 그녀는 한 교회를 찾아 갑니다. 그런데 친절한 사무원이 목요일에 다시 올 수 없겠느냐고 말합니다. 이유인즉 목사님이 “교회 대항 배구대회”를 준비하느라고 매우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한숨을 쉬며 터지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다시 오겠다고 말합니다. 그 여인은 외투로 몸을 여미면서 무거운 거름으로 예배당을 나옵니다. 그리고 혼자가 된 두려움에 빠집니다.

목요일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목사님의 사무실에 앉아 기다립니다. 목사님이 늦습니다. 목사님이 들어 와서 차를 권하며 이야기를 듣습니다. 삼십분을 듣고 난 다음 목사님은 화요일에 있는 커피 마시면서 대화하는 모임에 나오도록 그 여인에게 권합니다. 밖으로 나오면서 그들은 목사님의 부인과 마주칩니다.

“아! 참 여보”

그는 명랑하게 말합니다.

“이 분은 아무게 부인이신데 남편이 최근에 돌아 가셨답니다. 당신이 이 분과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겠소”

“아! 안녕하세요 아무게 부인.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래요, 댁과 이야기를 나누고 쉽군요. 그런대 어쩌지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교회 여전도회 연례 헌신예배를 위해서 교회당 현관장식을 하러 가는 길이예요. 우리 다음 금요일에 만날 수 없을까요?”

아무게 부인 편에서는 대답이 없습니다. 다만 아쉬운듯한 미소를 지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깨를 약간 으슥할 뿐입니다. 이번에도 그 여인은 외투에 몸을 여미면서 그 곳을 나와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 여인은 혼자입니다.

독자께서는 저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요점을 이해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어떤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이렇게 행동해 왔습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역사 광으로 자처하는 나로서도 역사 상 이런 공허함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내가 읽은 문학작품에서도 사람들은 일을 마친 후 편히 쉬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캔사스 주에 사는 농부가 농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는 그의 가족과 함께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원기를 회복하는 모습을 봅니다. (옆에 개가 있는데 그 크기와 색깔은 독자의 취향대로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1875년대 몬타나 주의 탐광자들이 모닥불에 둘러 앉아 별이 빗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광경을 상상해 봅니다. 별들이 반짝거리고 서늘한 바람이 산들산들 땅 위를 스쳐 갑니다. 광부들은 장화를 벗고 서서히 사그라지는 불 앞에 그들의 피로한 발끝을 쬡니다. 졸림으로 머리들이 끄덕거리기 시작하고 대화는 조용한 중얼거림으로 흘러 갑니다. 그들의 피곤한 몸을 누이자 낮은 한 숨 소리와 불 꽃 티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잠이 듭니다 – 조용하고 부드러운 긴 잠 속으로.

오늘 날의 세태와 대조가 됩니다. 출근 길 자동차나 기차에서 한시간,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아홉 시간, 그리고 퇴근 길에 한시간을 소모합니다. 도중에 아마 노트북 컴퓨터나 서류가방을 무릎에 놓고 일을 더 하겠지요. 집에 돌아 와서는 남은 음식이 아니면 사 들고 온 간이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T.V. 나 컴퓨터에서 두 시간을 보냅니다. 주말에는 밀린 집안 일을 챙기느라, 쇼핑 몰에 다니랴, 서류 정리를 하랴 시간과 몸이 매이게 됩니다.

이런 생활은 우리를 텅 비게 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거기다가 우리는 이 생활습관을 자녀들에게도 전해 왔습니다. 자녀들에게 온갖 취미 활동이나 오락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엄마는 아이들을 그 곳에 대려다 주어야 하고 기다리는데 한시간을 소모하고 또 집으로 대리고 와야 합니다. 늘 움직입니다. 정신 없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모두 어머니들인 내 친구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 엄마들은 아이들을 체육관에 다리고 가기 위하여 달음질을 칩니다. 아이들이 운동을 할 동안 그들은 쇼핑을 하고 이내 아이들을 다리러 돌아 옵니다. 그곳에서 곧장 그들은 아이들을 연극 반이나 피아노나 바이올린 교습소로 다리고 갑니다. 체 바뀌는 끝 없이 돌아 갑니다.

나는 마지막에 말씀 드리려고 제일 좋은 두 가지 말씀을 아껴 두었습니다. 시편 23장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 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 구절에 나타나 있는 형상은 온 몸이 더위로 지쳐 쑤시고 아픈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기운이 탈진하고 눈이 쑤시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조용히 흐르는 아름다운 강 가로 그를 인도합니다. 그 시내 물 한 가운데는 바위들이 있고 물은 그 바위 주위를 꽐꽐 소리 내고 거품을 일으키면서 흘러 갑니다. 그 사람은 시원한 풀밭에 누워 있습니다. 풀에는 이슬이 매쳐있고 창조의 향기가 사방에 스며 있습니다. 그 사람은 쑤시고 아픈 등을 누이고 끝 없는 푸른 하늘을 처다 봅니다.

이 시편 구절이 계속 됩니다. “그(하나님)는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다시 말씀 드리자면 영혼의 회복은 안식에서이지 활동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출애급기 33장 14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친히(사랑, 지혜)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ARTICLE INTRODUCTION
1. 위대한 영도자들 (The great Leaders)
2. 분노, 그것은 다만 당신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Anger)
3. 죽음은 끝이 아니다 (Death not the end)
4. 진화: 당신의 조상은 원숭이였을지 모르지만 나의 조상은 그렇지
5. 신뢰 (Trust)
6. 구원 (Salvation)
7. 社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 What Do Christian Believe)
8. 기도 (Prayer)
9. 하나님은 항상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God is always with you)
10. 하나님 탓하기 (Blaming God)
11. 구수네 사람들 (The Guths)
12. 리리의 놀라움 (Lily’s Surprise)
13. 마리아 이야기 (Maria Story)
14. 죄의식 (Guilt)
15. 목 적 (Purp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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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SE OF THE DAY
 For he chose us in him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to be holy and blameless in his sight. In love he predestined us to be adopted as his sons through Jesus Christ.
Ephesians 1:4-5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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